장미와 가시 - 김승희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 몸을 만지면서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라고

 

장미꽃이 피어난다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가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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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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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 - 박연준
 
 
오래된 시간 앞에서 새로 돋아난 시간이 움츠린다
머리에 조그만 뿔이 두 개 돋아나고
자꾸 만지작거린다
결국 도깨비가 되었구나, 내 사랑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졌다
일렁이는 거울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수천 조각으로 너울거리는 거울 속에
엉덩이를 비추어 보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배 뒤집혀 죽어 있는 풀벌레들,
촘촘히 늘어선 참한 죽음이
여름의 끝이었다고
징— 징— 징—
파닥이는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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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나는 너를 기다리는 것일까
오늘은 비명없이도 너와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말해도 좋은 것일까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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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십니까? -  도종환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날 몇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세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때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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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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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 gogh-souvenir de m..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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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멀리서 멀리서 보고 알았습니까.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까.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로 몰랐다고 하십니까.

그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 오랜 시간 외롭게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에야

당신은 그 그늘에 비로소 앉았습니다.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진 나무라 생각하던 그 나무 아래,  당신은 그제야 다가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제 저녁이 오는 소리를.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다 하십니다.

그 몇겹의 색깔을 읽어 보셨습니까.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내 가슴엔 수천의 꽃잎이 비명도 없이 떨어져 쌓입니다.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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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어느새 또 5월 8일이 돌아왔어요. 매년 5월 8일만 잘해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하지만 엄마, 제가 엄마 사랑하는 거 아시죠?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시”를 준비했어요.

엄마. 가만히 오른 손으로 왼손을 쥐어보세요. 전 혼자 있을 때 그렇게 해요. 꼭 엄마의 손이 제 손을 굳게 잡고 있는 듯해요.

눈을 떠 보았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의 늪 속에서
홀로 허우적거리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둠과 하나가 되어가는 절망을 느끼며
두려움에 나의 두 눈을
꼭 감았습니다.
“아, 이제는 끝이로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둠의 늪을 지나 환한 빛을 향해
당당히 걷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빛에 도달했을 때
저는 비로소 느꼈습니다.
제 뒤에 있던 당신을.

당신을 느끼기 위해
눈을 살며시 감아보았습니다
저를 붙들어 주었던
당신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당신의 눈물로
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신
당신은 저의 분수십니다.

당신은 제 호수의
분수대이십니다.

은빛 실을 내어
저에게 새로운 삶을 입히시는
당신은 저의 분수대이십니다.


( 나의 사랑하는 딸아이가 초등학생 때 어머니날 카드에 쓴 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다 지난 일인데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

================
엄마의 딸에게 보내는 글.

나의 생명, 나의 딸,
이젠 엄마보다 훌쩍 커버려서 한참 올려다 봐야 하는 우리 딸. 그래도 엄마는 지금도 늘 네 손을 잡듯이 나의 두 손을 모으고 널 위해 기도한단다. 잊지마,  우리에겐 우리의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시고 꼭 잡고 함께 가시는 주님이 계심을.

Do you remember all the pretty letters you gave to me from time to time?
Do you remember you used to prepare a "surprise", a little nameless flower, a little card.... anything that said "I love you, Mom" ?

I knew those little gifts were not just saying"I love you, Mom".  I knew they were telling me that "I need You.  I missed Mom  all day long."   ...that you were  alone and lonely.

I AM sorry, Dearest.   I've never been much of a mother, I know.  However, YOU have been always with me as part of my life where, when, whatever....

This is one of your letters you gave me when you were so little!
I miss you so much!

0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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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화단에 며칠 전 모란이 함박웃음처럼 화알짝 피었었다. 어제 저녁 일부러 카메라를 가져갔지만 벌써 시들어가고 있었다.

모란꽃을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 어린시절 우리 집엔 아주 큰 꽃밭이 있었다. 뒷마당 비스듬히 경사지게 만든 꽃밭에는 키 작은 채송화부터 맨드라미, 해당화, 모란, 사르비아, 칸나, 매화, 온갖 색깔의 장미, 사철나무, 무궁화, 찔레, 수국, .. 등등, 참 많은 꽃나무들이 (그리고 대추나무도) 있었다. 나는 언니 오빠가 모두 학교 가고 혼자 남은 오후, 쨍하게 깨질 듯한 정적 속에서, 그리고 현기증 나게 환한 햇살아래서 항상 꽃밭에서 놀았던 것 같다.  바닥에 뚜욱뚜욱 떨어진 꽃잎들을 주워서 돌로 찧어 혼자서 일인 몇 역을 하면서 소꿉놀이도 하고....  엄마를 찾아 부엌으로 가면 커다란 무쇠 솥들이 돌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주르륵 앉아있고 그 아래 불 꺼진 아궁이는 오후의 정적만큼이나 거대한 암흑의 입을 벌리고 나를 삼킬 듯 쳐다보았다.  평소 따뜻하던 부엌은 나른하고 외로운 오후의 정적 속에서는 항상 그렇게 두려움을 주는 장소였다.  엄마는 늘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계셨고 나는 참 외로웠다.

서울로 이사 오면서 유달리 꽃을 좋아하셨던 엄마는 모란꽃을 꽃밭에서 파서 싣고 오셨다.  서울에서도 몇 차례 이사를 갈 때마다 잘 견디어오던 모란을 어머니는 오빠가 마침내 아파트로 집을 바꿀 때 집 화단에서 우리 집 아파트 화단으로 옮겨주셨다.  못내 남의 손에 그 사연과 역사가 담긴 모란을 넘기고 싶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마침 우리 아파트가 1층에 있었기에 거실 바로 앞 화단에 그 모란을 심어주셨다.  엄마의 모란은 오랜 세월 죽지도 않고 참 감사하게도 봄마다 자줏빛 짙은 웃음을 벙실벙실 성실히도 피워올렸다.... 그리고 우리가 또 이사하면서 엄마의 모란은 그만  이제 남의 집 베란다 앞에 남겨지게 되었다.  가끔 그 아파트단지에 사는 언니를 방문할 때면 나는 일부러 내가 살았던 동엘 가본다.  베란다 앞 화단에 모란이 잘 있는지 보고 싶어서.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모란은 전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남아 몇개의 꽃을 성실히 피우고 있었다. 올 봄엔 가보지 못했다.  사실 두렵다. 그 모란이 어느날 웃음꽃을 거두게 되는 것을 보는 게...

새벽에 어렴풋이 눈을 뜨면 엄마는 항상 라디오에서 새벽의 명상 프로그램을 듣고 계셨다. 잠결에 들려오던 음악은 타이스의 명상곡과 생상의 백조였다.  그 많은 일과 중에서 늘 책을 읽으시던 어머니.  나이 들어, 앉아서 졸고 계시는 어머니께 '엄마, 누워 자..' 하면 얼른 '아니다..' 하시고 다시 무언가 하시던 어머니.. "잠자는 시간은 죽은 거 한가지인 데....." 하시며 살아 있는 시간들을 아끼시던 엄마. 

 

엊그제 동네에서 모란을 보았을 때,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가 잠든 공원묘원은 봄이되면 꽃이 유달리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래서 자기는 봄에 늘 공원묘원으로 놀러 가서 다른 사람들이 하필 묘지로 봄나들이를 가는지 이상하게 생각한다던 Mrs. Patch의 말이 생각난다.  난 한번도 엄마의 묘소에 가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그립다고 말하는 게 참  염치없고 죄스럽다.  내 삶이 하루하루 지칠만큼 피곤하다는 게 변명이 될까?  엄마.. 정말.. 죄송해요. 치매 병원에 계실 때도, 그렇게 그 곳에 홀로 남겨지는게 싫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 우리만 가면 집에 데려다 달라구 아기처럼 애교를 부리며 보채셨는데....  그때도 나는 자주 찾아 뵙지도 않았다.  참 모질고 이기적인 나쁜 딸이다.   인간은 얼마나 모질고 이기적인가.  어김없이 5/8일은 찾아오는데 나는 이제 엄마를 찾아뵐 수가 없다.


후회란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인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꼭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야 후회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란 안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때에야 후회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인간은 이기적이다. 

용서를 해 줄 이 이미 사라진 후에야 허공에 대고 용서를 구하는 이 이기심.


부끄러운 나의 사랑은 늘 그렇게 한 발 늦고야 만다.... (20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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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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